WHO, 충동적 공격성으로 1년에 143만명 사망

# 30대 여자 A는 실직 상태로, 돈을 벌기 위해 여동생 B의 집에서 한 살 된 B의 딸을 돌봐주며 양육비를 받고 지냈다. A는 B보다 학벌, 재산,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모두 뒤처졌고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 중이나 번번이 임신에 실패했다. B로부터 열등감이 심한 A는 주변 사람들이 항상 자신과 여동생을 비교한다는 생각에 자주 빠지곤 했다.

어느 날 B가 청소를 해놓지 않고 남편과 식사를 하러 외출한 것에 대해 A는 갑자기 심한 분노 폭발과 함께 B에게 심한 욕설을 하며 “청소까지 나한테 하라고 하는 거냐? 네 딸 돌봐주느라 내가 고생해서 임신도 안 되는 걸 모르느냐?”라고 소리쳤다. B는 A의 갑작스러운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무척 놀랐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반복됐고 B가 말대꾸를 하면 A는 B를 폭행하기도 했다.

A는 자신의 실직 상태인 것과 임신 실패로 가족들로부터 소외된다고 믿고 있었다. A는 가족들이 자신을 탓하고 무시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점차 커졌고 이에 따른 우울, 불안감을 애써 억눌러 왔다. 실직과 불임에 대한 죄책감을 스스로 이겨 낼 수 없었던 A는 분노 폭발을 통해 B가 모든 잘못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죄책감을 모두 타인에게 떠넘긴다. 분노 폭발은 A가 견디기 힘들어하던 감정을 해소해주는 도구로써 이용됐다.

A의 이런 분노는 △보복 운전 △층간소음 폭행 △버스 운전기사 폭행 △묻지마 폭행 등과 같은 감정적·충동적 공격성으로 분류된다.

woman-1253505_1920

감정적·충동적 공격성은 어떤 위협, 모욕, 자극 등 스트레스 상황에서 일어나며, 미리 심사숙고하지 않고 갑자기 발생한다. 행동과 함께 화, 흥분이 동반(교감신경의 항진)되는 특징이 있다.

2007년 WHO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총기에 의한 사망을 제외하고 폭력에 의한 사망이 한 해에 143만 명이다. 이 중 대부분은 충동적·감정적 공격 때문에 발생했다.

서울대병원 안용민 교수는 <정신건강의학의 시각으로 본 현대인의 분노>라는 보고서에서 충동성의 심리적 측면을 분석했다.

안 교수는 감정적·충동적 공격성을 △사람들은 분노를 참았을 때 겪어야 하는 불안, 우울, 죄책 등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견디어 낼 수 없으므로 분노를 폭발시키는 행동으로써 이런 감정을 회피하려 한다 △분노 폭발은 타인이 봤을 땐 마치 그것이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수동을 능동으로 바꾸고, 무력하고 취약한 자신을 권력을 행사하는 자신으로 변형시키려 하는 행동이다로 진단했다.

안 교수는 감정적·충동적 공격성을 세 가지 패러다임으로 분류했다. △인내심이라는 가치를 쓸데없다고 믿고 있다(punished and/or extinction) △기다리면 더 큰 보상이 오는 것을 포기하고 즉시 받을 수 있는 작은 보상을 선택을 한다(reward-choice) △행동이 자극에 즉각 반응하여 자동으로 나오는 것을 멈추는 능력이 없다(response disinhibition)

또 안 교수는 이 공격성을 생물학적으로도 설명했다. 충동성을 조절하는 뇌의 부위는 변연계다. 변연계에서 세로토닌을 분비하는 신경세포가 분비를 줄이면 자신의 행동을 처벌하는 양심과 같은 기능이 줄어들어 충동성·폭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에 세로토닌의 생산을 촉진하는 물질을 섭취해 분비를 늘리면 다시 양심, 초자아와 같은 기능이 커지면서 충동, 폭력성이 감소한다.

남성의 뇌척수액에서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농도가 높은 경우 더 공격성이 높았으며, 이를 낮춰주는 약을 복용할 경우 공격성이 감소한다며 안 교수는 호르몬 농도가 공격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fist-1148029_1920

2012년 미국에서 3만5000명을 대상으로 1:1 면담을 통해 충동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전체의 17%가 충동성 검사에서 충동적 성향 진단을 받았고 남자가 여자보다 1.4배 높았다.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젊은 성인일수록,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충동적으로 나왔다.

충동성은 나이가 들수록 감소, 충동성을 갖는 사람들 중의 83%가 일생에 한 번 이상 정신과 질환을 앓았음에 비해 충동성 없던 사람은 62%로 적었다. 인격장애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경계선 인격장애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흔하게 보인 충동적 행동은 심사 숙고 하지 않고 즉흥적 성관계를 맺는 것(34%)이 높게 나왔다.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보다 에이즈나 성병에 걸릴 확률이 2.1배 높았다. 충동적 사람들 중 타인을 폭행하거나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는 사람의 비율은 26%,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들 중에 타인을 폭행하거나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는 사람의 비율은 2.9%로 나와 약 10배 차이를 보였다.

이에 대해 안 교수는 “자신 또는 타인에게 물리적 피해를 주는 행동은 충동적 성향을 갖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9.3배나 높게 나타났고 이들은 정신과적 질환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며 주의 깊게 봐야한다고 했다.

경계선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는 경계선(Borderline)이라는 말처럼, 극히 변덕스럽고 극단적이다. ‘나’라는 자아상이 확고하지 못해 항상 공허하고 불안한 감정이 기저에 깔려 있다. 그로 인해 작은 자극에도 쉽게 감정 기복이 크고 행동이 충동적이다. 정신질환들 중에서 충동성의 대표적인 예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타인의 자아에 의지하려하며 이에 타인에게 버림 받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타인이 자신을 버리지 못하게 자살 시도로 협박하는 행동이 자주 관찰된다. 자살에 성공하는 경우도 많다. 병원 응급실에 자살 시도로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주 발견된다.

men-1179452_1920

안 교수는 충동적인 공격성의 치료 방법으로 약물 투여와 인지행동치료를 제시했다.

리튬(Lithium)은 기분조절제로 기분을 안정화 시켜 주는 역할을 하며 조울증에서 주된 치료제로 사용된다. 위약(placebo)과 비교해도 소아, 청소년, 성인 모두에서 감정·충동적 공격성을 줄여 준다. 항우울제인 플록세틴(fluoxetine)은 성격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위약에 비해 유의미하게 충동적 공격성을 줄여 줬다. 항경련제인 페니토인(phenytoin), 카바마제핀(carbamazepine), 디발프로엑스(divalproex)는 각각 교도소 수감자, 치매환자, 행실장애 환자에서 충동적 공격성을 줄여 주는 효과를 보였다.

비약물 투여 방법인 인지행동치료도 최근 미국에서 크게 주목 받고 있다. 이 치료법은 명상 훈련을 통해 현재 순간에 집중해 회피하지 않고 현실을 수용하도록 한다. 충동성이 발현되는 순간을 각자가 발견하고 멈출 수 있도록 돕는다. 미국 교도소 수감자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비행에도 효과적이다.

안 교수는 “충동적 공격성을 보이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계획적으로 준비해 해소하는 사람들은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분노 폭발로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 전에 정신과적 개입이 필요하다”며 “우선 정확한 정신과적 평가, 진단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후 정신과적 치료가 자신의 분노를 이해하고 조절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