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가 의료진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자 대한의사협회가 ‘의료기관 내 폭력 관련 설문조사 결과 발표 및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13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한의사협회(회장: 최대집)는 의료기관 내 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사항 △반의사불법죄 폐지 △환자에 대한 진료거부권 의료법에 명시 △진단서 허위발급을 요구하거나 종용하는 행위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 △의료안전 시설 및 장비 설치를 위한 정부 재정투입 및 범정부협의체 구성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대한의사협회가 지난 13일 ‘의료기관 내 폭력 관련 설문조사 결과 발표 및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의협은 지난 6일부터 닷새간 회원을 대상으로 긴급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에 2034명이 응답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진료실에서 환자·보호자 등으로부터 폭언 또는 폭력을 당한 회원은 전체 2034명 중 1455명으로 71.5%에 달했다. 이는 응급실 등을 제외한 외래진료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집계한 수치다. 그동안 응급실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됐으나 실제로는 일반 외래진료 중에도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폭언 또는 폭력을 경험한 의사 가운데 약 15%가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확인됐다. 단순 폭언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폭력에 노출되는 비율도 낮지 않다는 뜻이다.

진료실에서 경험한 폭언 또는 폭력으로 인한 피해 역시 심각했다. 신체적인 피해, 즉 부상에 이른 비율이 10.4%에 달했고 이 가운데에는 봉합이나 수술, 단기간의 입원, 심지어는 중증외상이나 골절로 생명을 위협받은 경우도 발생했다.

이런 진료실에서의 폭언과 폭력을 1년에 한두 번은 경험한다는 의사의 비율은 50%가 넘었다. 매달 한 번씩은 겪는다는 비율도 9.2%에 달했고 드물지만 매주 1회 이상 또는 거의 매일 겪는다는 응답도 나왔다.

폭언 또는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로는 진료결과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았고 이외에도 긴 진료대기시간과 비용 관련한 불만 등이었다. 이중 진단서와 소견서 등 서류발급과 관련한 불만이 응답자의 16%로, 상위를 차지했다.

의협은 “최근 실손보험 청구라든지 장애등급의 판정 등을 위해 의사에게 진단서와 같은 서류를 원하는 대로 써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강요를 하거나, 심지어는 협박하는 사례들도 있으며 이러한 갈등이 폭언과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며 “이번 설문조사에서 실제 환자의 상태와는 다른, 허위 진단서 발급이나 이미 발급된 서류의 내용을 허위로 수정하도록 요구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의사 회원은 전체 응답자 2034명 가운데 무려 1254명, 61.7%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최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벌어진 폭력사건도 환자가 장애등급 판정을 위해 무리하게 진단서를 요구하고 의사가 이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의협은 “대부분의 의사회원이 진단서의 허위발급을 요구하는 사람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법규가 필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현재 의료법에는 진단서를 허위발급한 의료인에 대한 처벌규정만 있다”며 “대한의사협회는 진단서 허위발급을 요구하거나 종용하는 사람에 대해서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의 제정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지난 13일 열린 ‘의료기관 내 폭력 관련 설문조사 결과 발표 및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설문조사를 발표하고 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반의사불벌죄 삭제와 진료거부권 확보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폭언이나 폭력을 당하였을 때, 경찰에 신고하거나 법적으로 대응한 회원이 28%에 달했으나 이 가운데 실제 실질적인 처벌에 이른 경우는 10%에 불과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찰이나 사법 관계자의 설득 또는 권유로 인해 의사 본인이 고소·고발 등을 취한 게 가장 많았다. 또, 피의자의 사과나 요청에 의한 취하, 사법 절차 진행에 따른 부담감으로 인한 취하까지 합치면 처벌에 이르지 못한 경우의 74%가 바로 이런 사례들이었다. 의료기관 내 폭력에서 피해 당사자가 처벌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고 이는 반의사불벌죄 조항 삭제가 필요한 이유라는 게 의협의 지적이다.

한편, 한번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는 환자나 보호자가 시간이 흘러서 다시 진료를 보기 위해 내원한 비율이 61%나 됐다.

의협은 “해당 환자를 진료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의 다른 환자를 진료하거나 진료 외적인 일상생활에까지 스트레스를 호소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결국 이런 결과를 볼 때, 이전에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한 사람에 대해서는 의사가 분명하게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진료거부권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진단했다.

올해 초 의료인 폭행 문제를 놓고 많은 대안이 제시됐을 당시, 의료기관에서 의료인과 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는 현장의 목소리와 안전수가 도입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의협은 “하지만 현재까지도 정부는 응답이 없다”며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현재 진료실에서 폭언이나 폭력이 발생할 때 피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는 응답은 전체의 6.9%밖에 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대부분의 진료실이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에 있는 의사들은 사고가 터지면 몸을 숨길 곳조차 없다는 것”이라며 “정부 차원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전폭적인 지원과 의료기관 안전수가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김승한 기자

전 대학병원 연구원. 'MBN 세상의눈', '용감한 기자들', 'EBS 다큐프라임' 출연. 내부고발·공익제보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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