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 코로나19 확진자 퇴소

코로나 바이러스와 공생이 일상이 돼버렸다. 의식주, 여가, 문화 모두 코로나라는 그악한 변수에 포섭됐다. 어제는 어느 마을, 오늘은 어느 도시에서 확진자가 무시로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린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확진자의 생활은 들여다본 적 없다. 그들이 어떤 과정과 절차를 밟고 확진자로 판정받고 이후엔 어떤 수순으로 이동하고 격리시설에서 생활하는지.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 아니라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검색하거나 그를 바탕으로 상상해낼 기회조차 없다.

헬스타파는 단행본 <코로나에 걸려버렸다>와 어느 확진자의 수기를 참고해 코로나19 확진자의 격리 첫날과 마지막 날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해보았다. 방역수칙 안에서 막연히 꺼리고 두려워하기엔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미 너무 많은 확장세를 보이고 확진자는 이제 나와 남을 가리지 않는다. 모쪼록 이 내러티브가 코로나19 확진자의 일상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시도로 읽혔으면 한다.


방역 당국의 방침에 따르면 생활치료센터에 입소 후 일정 시간이 지나고, 그 즈음에 체온과 산소포화도 상태가 48시간 동안 양호하면 퇴소하게 된다. 이른바 완치 판정이다.

센터를 나서는 순간에도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기침이 좀체 멎질 않았고 가래가 올라왔으며 콧물과 두통으로 고생했다. 미열이 있었으나 센터 퇴소 기준을 상회하는 선은 아니었다. 어떠한 병이라도 개인 차는 있겠지만 증상도 전혀 나타나지 않은 채 바이러스가 지나가는 환자도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유난스러운 건지, 예민한 건지.

사진=셔터스톡

센터의 일과는 일찍 시작했다. 의료진이야 24시간을 교대로 일해 이르고 늦고의 개념이 없겠지만 말이다. 오전 6시 30분이 되면 자가 평가 문진표가 메시지로 온다. 혈압, 체온, 산소포화도 등 이른바 바이탈 수치를 확진자 스스로 체크해야 한다.

센터 입소 첫 날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는 간단한 OT를 통해 바이탈 체크 장비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그 후 하루도 빠짐 없이 내 상태를 검사해 전송하니, 이젠 정맥주사 같은 것도 혼자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자신감이 일었다.

아침 식사를 받는다. 8시쯤 밥이 들어오기까지 다시 자기도 일어나자니 할 일도 딱히 없어 밤 사이 일들을 검색했다. 날이 차가워져서 확진자는 증가 추세를 보인다고 한다. 방역 수칙에 소홀해 그 어마어마한 숫자 하나를 내가 올렸다는 생각에 면구스럽다. 마주한 적 없지만 나를 향해 짓쳐들어올 것만 같은 친지의 원망, 직장 구성원들의 비난, 세상의 질타에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나로 인해 역학 조사를 받고 자가 격리 기간을 보낸 단골 점포 사장님의 원망 섞인 문자 내용이 떠올랐다. 그는 짐짓 농담인 채 이야기했으나 생업을 몇 주간 전면 포기해야 하는 무게가 행간에서 느껴졌다.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아침 메뉴는 가벼운 식단에 무거운 양이다. 편의점 샌드위치, 김밥, 인스턴트 죽 등이었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남김 없이 먹었다. 센터 생활 전부터 출근길에 많이 먹던 것들이라 익숙했다. 쓰레기는 발치에 놓여있는 폐기물 통에 전부 넣었다. 재활용이건 태우는 쓰레기이건 나눌 수 없다. 확진자 손에 닿은 이상 전부 폐기 처분이다.

환경오염과 폐기물 더미에 대한 우려는 진작에 버렸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인간이 생태계를 야금야금 잠식해 동물 종간 이동, 전파 등으로 나타난 이상 현상이라는 데 비춰보자면 인간은 멈추어 향후를 어떻게 설계하고 그려나갈지를 고민해봐야 할 시점일 텐데, 그런 식의 성찰은 안 보이고 또 어떤 첨단 기술로 바이러스를 정복할 지에만 궁리를 이어나가는 듯하다.

하긴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니다. 나 역시 확진자가 되기 전 갖은 문명과 기술, 기기 안에서 황홀경을 느끼곤 했다. 더 빠르고, 더 편리하고, 더 태가 나는 것들을 두고 속수무책이었다. 채 세 평이 안 되는 이곳 센터 안에서 바이러스와 인류의 한계 같은 것을 고민하다니 코웃음이 난다.

폐기물 통이 꽉 차 문 앞에 내놓았다. 되도록 의료진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가벼운 눈인사나 수고하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가도 행여 모를 불상사가 일어날까 말과 마음을 아낀다.

입소 후 사나흘 쯤 지나니 가벼운 증세들이 보인다. 목 안이 따끔따끔 하더니 기침이 나고 어릴 때도 안 흘린 코가 흘러나온다. 음식을 잘못 먹거나 물갈이를 하는 모양인지 하곤 여겼던 설사도 병증의 하나라고 한다. 변의 상태도 보고해야 하는 수순에 접어들었다.

열에 들떠 잠인지, 꿈인지 모를 기척에 밤이 괴로웠다. 입소 전 미처 챙기지 못했던 항우울제를 처방해 달라고 센터에 요청했다. 신경정신과와의 협진 및 복용 약 처방은 어렵다며, 기존에 다니던 의원에서 받은 약을 반입할 순 있다고 한다. 부모님께 부탁해 사정을 설명하고 약을 받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그밖에 일용할 물품들을 소셜 커머스 같은 곳에서 주문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간혹 반입하기 난감하거나 거부감을 일으킬 법한 물품을 요구해 센터 관계자들을 난처하게 하는 입소자들도 있다고 한다. 몇 주 전에는 어떤 입소자가 성인용품을 주문해 들이려다 제재를 받기도 했다고. 어쩌면 생사가 달린 현장에서 맹렬하게 생을 의욕할 수도 있는 걸까. 하긴 전장에서도 생의 명멸은 가득했다.

간단한 기구들을 주문해 운동을 시작했다. 가벼운 맨손 운동부터 몸을 이용한 근육 운동까지. 맥 없이 누워만 있으려니 고역이었다. 기존에 지녔던 우울에 코로나블루가 더치며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매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땀이 나는 움직임을 지양해야 했지만 이제는 더러움의 문제를 지났다. 운동을 시작하니 확실히 기분이 가벼워졌다.

책 읽기를 재개했다. 일에 치이고 몸이 고단하다는 핑계로 사두고 쟁여만 놓았던 책들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한 쪽을 넘기기가 버겁던 독서가 늘어갔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추리 소설부터 새로 주문한 바이러스 관련 서적까지 센터 안이 작은 고시실처럼 변해갔다.

바이러스 한 종의 백신을 개발하기까지 통상 10~15년이 걸린다고 읽었는데 전대미문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백신의 상용이 곧 가시화 된다니 역시 어제의 지식은 오늘의 현실을 쫓아갈 수 없는 걸까 생각을 했다. 무엇이 됐든 이 지리멸렬한 시간이 어서 종식되기를.

체온이 어제 저녁에 이어 오늘 아침까지 정상 수치를 보인다. 산소포화도나 혈압도 정상수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몸이 돌아왔음을 느낀다. 오늘 저녁 문진에서 별 이상이 없으면 내일 정오 전에는 퇴소할 수 있다고 센터 관계자가 알려왔다. 드디어 탈출인가. 아니, 나가서도 여전히 방역수치를 준수하고 사람 사이 거리두기를 이어가야 하니 온전한 탈출이 아니고 더 큰 센터로의 이원일 수 있겠다.

사진=셔터스톡
사진=셔터스톡

부산스레 짐정리를 시작했다. 거개 폐기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그 때 걸려온 전화. 회사의 부서장이었다. 확진자가 완치 사전 판정을 받고 퇴소를 앞둔 경우 그의 사업장에 전화를 걸어 미리 공지한다는 규정이라도 있었을까.

OO씨, 통화 가능? 고생 많지, 몸은 좀 어떻고? 우리 모두 다 OO씨 무사 퇴원하기를 바라고 있어. 다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요즘 회사 상황 어려운 거 알지. 곧 구조조정 이야기도 돌고. 그래서 말인데··· 자기··· 복귀하는 거 말이지, 그게··· 저···

그는 말을 얼버무렸지만 그 어느 말보다 정확히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는 통화였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말을 다 듣고 퇴소 후 출근해 이야기 하자고 답했다. 통화를 마친 후, 버릴 물건이 많아 손을 성마르게 놀렸다.

퇴원을 했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회사에 나간다. 회사에선 거듭해 쉬라고 했지만 마다했다. 그래서인지 동료들의 눈초리는 곱지 않다.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한 번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사람은 영원히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엊그제부터는 부서장이 따로 불러내 은근하게 퇴사를 종용한다. 다음 달이면 구조조정과 희망퇴직이 있을 예정인데 조금 먼저 떠나면 위로금을 더 넣어주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구조조정 이야기 때문인지 회사 분위기가 흉흉하다. 직원 모두가 쓴 마스크는 표정이나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게 될지, 오래지 않아 나는 떠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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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환희 기자

일생을 지망생으로 살았다. 가수지망생, PD지망생을 거쳐 취업지망생까지. 지망은 늘 지망으로 그쳤고 이루거나 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야기를 짓는 일을 지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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